이젠 강경애시시비비서 물러섭니다
강경애시시비비—뜻하지 않게 일어난 이번 거의 한달간 두번째 시시비비는 이젠 마루리할 때가 되지 않았냐 싶다. 서로간 많이 자제하고 서로간 리해가 보다 깊어지니 더이상 시비를 이어갈 필요가 없는것 같다.
지난 1월 9일, 조글로사이트를 오르내리고 있는데 어느 순간인가 관련 문학코너에 “강경애 명예원상복구라니? 이럴 수 없다”라는 김송죽선생의 글이 떠올랐다. (이는 또 뭐야?) 뜻밖의 일에 나는 일순 심장이 뚝 멎는것만 같았다. 중한 관련분야를 들썽한 경경애 김좌진장군암살 공범 시시비비가 끝난지도, 강경애의 명예가 원상복구된지도 만5년이 되였는데 또 시비를 붙이는 이가 있다니? 울컥 피가 끓어번진 나는 즉각 반격하고 싶었다. 그러나 올해 나 2010년 생활과 행동의 신조로 내세운 “삼사이후행”(三思而后行)이 떠올랐다. (그래 덤비지 말고 천천히 지켜 보기로 하자!) 마음을 다잡은 나는 먼저 사태의 흐름을 주시하기로 했다. 시간도 문제지, 기말시험과 겨울방학간 준비 1월은 우리로 말해 눈코뜰새 없는 긴장한 나날이여서 어디 곁눈길을 팔기도 어려웠다.
그럴 때 진실이란 아이디 즉각 댓글반격이 개시되였다. 처음은 선의적인 자제 느낌이더니 김송죽선생의 글이 워낙 격하고 도전적인 글이여서 진실님도 만만치가 않았다. 나는 후, 한숨을 돌리였다. 누군가는 반론에 나서야만 하는데 진실님이 등장했다. 2005년 1월과 2월사이 첫 강경애시시비비에서는 장춘식님이 손을 잡아 주더니, 이번에도 진실님이 나서주니 됐어. 나는 큰 힘을 얻었다.
나는 인차 북경의 후배(아래벌) 친구 장춘식님과 연변의 조성일회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두분은 모르고 있었다. 그후 나는 또 장춘식님과 두어번 통화했다. 가만 있으면 그 영향이 나쁘다는것이 나의 뜻이였다. 왜냐면 김송죽선생으로 인한 강경애 풍파가 우리 조선족 문단과 선생의 글을 보는 이들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수가 있고, 사실을 잘 모르는 이들이 김송죽선생의 주장을 진실로 믿을수가 있겠기 때문이였다.
여러날이 흐른 어느날인가, 북경의 장춘식님이 소리없이 강경애 관련 견해와 글 여러편을 조글로 관련 문학코너에 올리였다. 아무런 티도 없이 취하는 태도가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사실 반론의 글들이면서 이런 태도가 좋았다. 그 이상 가만있을 수가 없어 나도 동조하여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 “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31년”이란 등 5편의 글을 조글로 문학코너에 올리였다. 모두가 2005년 1-2월 사이 문화산맥사이트 강경애시시비비 글들이였다. 장춘식님을 따른, 김송죽선생을 껴들이는 직접 반박의 새글이 아닌 소리없는 반격이라고 볼수가 있겠다. 이날이 1월 23일, 김송죽선생이 첫 글을 올려 10여일 후다. 그래도 70고령의 김송죽선생의 기세 조금도 누그러들 기미가 아니였다.
진실님이 고마왔다. 장춘식외 다른 누구도 나서지 않는 그 나날에 진실님은 김송죽선생의 여러편의 글들에 꾸준히 김좌진장군은 리복림에 의해 사살되였다를 주선으로 지희겸선생, 리연록 군장의 증실출처까지 밝히며 장문(長文)의 댓글을 련속 올리며 김송죽선생의 견해와 주장을 반박하여 나섰다. 뼈가 있는 진실님으 댓글에도 김송죽선생의 기세는 주눅이 없다. 70고령의 로인을 건드리는 일이 참으로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가만 있으면 뭐가 되나 싶다.
(안되겠어. 이러다간 로인님이 꺼꾸러지면 어떻해, 로인님을 성의로 진심으로 도리로 도우는 것이 옳은 태도야 , 마음을 움직여야 해!)
나는 긴장한 시간에서 한발을 빼고1월 25일에 극히 자제하는 선의적인 글—“김송죽선생님께 드리는 글”(1)을 써서 올리였다. 할말은 하면서도 상의식으로 나왔다. 웃는 낯에 침을 뱉으랴고 김송죽선생의 격한 모습이 다소 누그러지는 기미가 가끔 보이였다. 우리 모임에서 술을 마시고 왔다가 올린 련속 두번의 조금 강한 어조의 나 댓글이 후회스러워 또 인차 서로 리해하자는 내용의 비교적 긴 선의적인 댓글을 올렸더니 서로 스스럼없는 사이처럼 리해의 말들도 오고갔다.
한걸음 물러서서 립장을 바꿔 보면 지금껏 김좌진장군 암살이 박상실이고, 강경애가 공범이라는 김송죽선생의 견해와 주장이 리해되기도 했다. 이런 견해와 주장을 하루아침에 바꾸라는 것은 말도 안된다. 시간이 필요했다. 또, 김좌진장군과 암살과정에 대해서 많은 력사지식을 소유하고 계셨다. 어우기 자유시참변을 겪은 장군이 내심상처, 대동단결을 주장하나 뜻대로 되여가지 않은 그때 그시절 현실과 고초는 김좌진장군을 다시 리해할 필요가 있다는 계시를 강하게 던져 주었다. 진실님한테서도 리복림이 곧 박상실이라는것, 내가 그리도 알구프던 지희겸선생, 리연록군장 증실의 출처 밝히기 등은 대단히 감사한 일이였다.
나로 말하면 김송죽선생이나 진실님을 알고 교류할 계기를 마련해 준 이번 두번째 강경애시시비비는 유익한 시비고 선의적인 쟁론이였다고 느껴진다. 시시비비 통해 강경애는 김좌진장군 암살 공범이 아니며 이 암살과 무관하다는것을 강경애 행정과 조공당 만주총국 화요파에 의한 리복림 사살이라는 것을 다시다시 세인들께 널리 알리면서 그 와중에 모르던 허다한 면을 알게 되였다. 이번 시시비비에서 또 스스로도 한걸음 보다 성숙되였다는 느낌이다. 뜻이 아닌 시시비비에서 인연도 없던 우리 소설가 김송죽선생을 알게 되고 앞으로 거래하며 교류할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고 누군지는 아직 몰라도 어느정도 짐작은 가는, 김좌진장군 사살 전후관계를 익히 아는 진실님의 힘있는 공조를 받았으니, 이런 경우를 두고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되였다고 하는걸까.
아직도, 1993년 7월 해림 김좌진장군 관련 세미나 옳히 리해문제, 조공당 화요파에 대한 극단적인 비하 평가문제, 김좌진장군 타당한 평가문제 등을 제대로 리해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지만 이는 시간에 맡기면서 김송죽선생 어른님이 스스로 터득해야 할 문제들이 같다.
오늘부터 강경애 두번째 시시비비에서 완전히 물러섬을 여러 분들께 올리는 바입니다. 이번 일로 하여 얻은것이 많고 시간도 꽤나 떼웠는데 이젠 마음을 원곬으로 돌리여 내가 해야 하는 일—남방 겨레발자취 답사에로 나서야만 하겠지요. 2월 한달간 겨울방학이란 이 소중한 기회를 지나치지 말아야 하니 김송죽선생님, 진실님의 계속되는 편달과 교류가 이어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나의 메일은 guangren33 한메일입니다.
2010년 2월 2일, 강남땅 두앵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