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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은 누구며, 화요파는 무엇인가? (1)김송죽
 > 2010-3-6 15:24:00 조회 : 214 

                                                ㅡ 중국조선족력사학계에 보내는 글

                                                    (조글로 2010 02 28 18 03 50)

 

                                                          김송죽

   

   나는 새해들어 첫 한달은 한국에서 유관 “녀류작가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암살공범”이라 한것은 옳거니와 그것은 사실이라는 나의 주장과 근거를 내놓음으로써 학계에다 그 진상을 알리려했고 따라서 인차 반론에 부딧쳐 론전을 치르게 되였다. 한데 이번 론전은 주제를 떠나 지협적인것에 매달리다보니 예상밖에 시간을 많이 끌었다.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 모르던것을 알게된것도 있으니 시간을 헛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반론이 있으면 당당히 나서라했건만 상대측은 그러지 않았거니와 패배를 시원스레 승인하지 않고 총망히 물러나고말았다. 그래서 기분이 잡친 나는 격한 표현으로 그러는 그를 신사답지 못하다고 비난 한 것이다. 객관인 제3자는 잇터넷에 오른 나의 마지막 글 “시시비비를 마무리면서” 를 읽어보면 누구나 이번 론전의 결과를 짐작하게 될 것이다.

   왠지 “창작마당” 칼럼,기획에 올랏던 나의 마지막 몇편글은 없어졌다.

   조글로의 “문학닷컴 웹진 2010년 제1호 문단쟁명 〔김송죽&리광인〕”에 그것을 올렸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 글 본체는 아직 영 지워지지 않고 “작가미니홈” 나의 클럽에 저장되여 있으니 못본 분은 찾아 읽어보기 바란다.

   이번 론전에 나와 대결했던 연변대학의 리광인선생은 시시비비에서 물러나면서 “아직도 ‘1993년 김좌진관련세미나 옳히 리해문제, 조공당화요파에 대한 극단적인 비하문제’가 남았다”고 했기에 나는 생각다못해 일종의 책임감을 느낀데서 이 글을 가첨하여 내가 왜서 감히 조공당화요파는 “미런한 짓을 하고 민족과 력사앞에 죄를 지었다”고 하는가? 왜서 화요파의 거물급인물을 “악질”이라 욕했는가 하는 나의 그같은 견해와 주장이 나오게 된 원인과 근거를 단지 문학계만이 아니라 력사와 관계되니 력사계에까지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론전이 이미 끝났음에도 이번 글을 더 쓰게 된 리유인 것이다. 아래 몇조목으로 나누어 문장을 꾸미니 문장이 길어지는데 독자는 내심하게 마감까지 읽어주었으면 고맙겠다. 

   

   1. 무오독립선언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단군황조(檀君皇朝)께서는 상제좌우(上帝左右)에서 명을 내리시여 우리에게 기운(機運)을 주셨다. 세계와 시대와는 우리에게 복리를 주고자 한다. 정의는 무적(無敵)의 칼이므로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4천년 조종(祖宗)의 영휘(榮輝)를 빛내고 이로써 2천만 적자(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다.

   궐기하라! 독립군! 독립군은 일제히 천지를 바르게 한다.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이니 개, 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랴. 살신성인(殺身成仁)하면 2천만동포는 같이 부활할 것이다.

   일신을 어찌 아낄것이냐. 힘을 기울여 나라를 회복하면 삼천리 옥토는 자가소유(自家所有)이다. 일가의 희생을 어찌 아깝다고만하겠느냐.

   아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된 본령을 자각한 독립인것을 명심할것이요,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의 자립인 것을 명심하도록 황천의 명명(明命)을 받들고 일제의 사악(邪惡)으로부터 해탈하는 건국(建國)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이것은 1918년 11월 13일에 길림에서, 대종교의 제2세교주 김교헌(金敎獻)을 비롯하여 제3세교주 윤세복과 김동삼, 신규식, 박은식, 박찬익, 김좌진, 리시영, 리상룡, 신채호, 리동녕 등 대종교중진이 주축이 되여 39명의 서명자가 만주와 로령의 유지일동이란 명의로 세상에 발표한 독립선언서인 것이다. 중관단의 발기로 무오년에 발표했다하여 혹은 중광단선언이라고도 하는 이  “무오독립선언”은 일제에 항쟁한 거족적인 3.1운동의 선언서는 물론 일본 동경류학생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서보다도 선구적으로 썩 앞섯거니와 그에 기폭제로 되였기에 무엇보다 력사적인 의의와 가치가 큰 것이다.

   “무오독립선언”은 민족종교인 대종교바탕위에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것은 조국을 광복시키고야말겠다는 굳은 결심과 결단코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우리 조선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깨우치면서 일떠나 항일하라고  호소한 것이다.

   “궐기하라! 독립군!....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열혈이 끓게 하는 이 웨침! 항일민족독립운동의 이같은 명확하고도 철저한 방략이 그때 그 시절에 바로 우리가 지금 발을 붙이고 사는 이 땅에서 나온것이다. 하여 어젯날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여기 이 만주땅은 실제상 독립운동의 책원지로 되었고 항일독립전쟁의 치렬한 전투장으로 되었던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난세기 2,30년대였다. 끓어번지는 열혈과 청춘을 바쳐 싸웠던 독립군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강도일제침략자와 영용불굴하게 싸워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바친 그들을 우리는 내민족 내집사람으로 여겨야지 남처럼 다르데 보고 배척해야 할 아무런 리유도 없다. 

   력사는 지난일인데 돌이켜보면 무엇을 명기해야 하는가를 알게되는 것이다. 하기에 지난일을 잊지 않으면 뒷일의 교훈이 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우리가 력사를 중히 여겨 연구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본다.

   지금으로부터 418년 전, 조선의 력사에서는 지긋지긋한 혹심한 재난에 빠진 년대였던 저 임진왜란당시, 조선의 재상이였던 유성룡은『징비록』에다 이런 글을 남겼다. 

   “적병은 무릇 우리 나라 사람을 붓잡기만 하면 코를 베여 위세를 부렸다”

   일본승려 교넨(慶念)의 『조선일일기』에는 좀더 자세히 기록되였다.

   “역사상 이 전쟁처럼 슬픈것은 없다. 병사들이 가는곳마다 살육을 일삼고 불을 지르니 그 연기가 마을마다 가득하였다. 조선 사람의 머리와 코를 대바구니에 담으니 대바구니가 가득했고 병사들은 모두 피투성이가 된 바구니를 허리춤에 달고 싸웠다”.

    우리 조선사람의 코를 베여 그것으로 유일무이(唯一無二)의 커다란 “코무덤”(훗날 “귀무덤”이라 고침)을 만들어 후세에 전하는 나라는 이 세상에서 일본밖에 없다. 사무라이족속(族屬)ㅡ 그 야만스러운 잔인성이 발작한 침략자들이 조선을 병탄하고나서 여기 이 동북까지 들어와서는 어떻게 했는가를 보자. 한가지 례만 들겠다. 괴뢰 만주국이 건립된 초 북만의 해림근처 전사호툰(前沙虎屯ㅡ지금의 중홍촌)에서 발생한 일이다. 그 마을에는 독립군이 해체되자 가정이 있음으로 하여 관내에도 산에도 가지 않고 농사질하는 독립군이 19명 있었는데 비내리는 어느날 밤, 복면한 일제살인귀 셋이 한무리의 정안군을 앞세워 마을에 들어와 독립군 19명을 하나하나 붓잡아 마을밖 “장군나무”밑으로 끌고가서는 그 마을의 중국사람을 위협하여 작두로 목을 자르게 했는데 목 하나를 자르는데 돈 3원을 주었다. 전신이 독립군의 피로 즐벅히 젖은 그 중국사람은 보복이 검나 날밝기전에 녕안쪽으로 내빼고말았다.

   “간밤에 중국사람이 조선사람을 죽이고 도망갔다!”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웨쳐대면서 떠들었다.

   며칠안되여 일본군과 할빌령사관의 <<사건조사단>> 사람 몇이 나타나 “황국신민이 된 조선사람이 이국땅에 와 살면서 되놈의 손에 이같이 참살을 당하니 과연 가슴아픈 일이요”하면서 조난자의 가정에 <<위안금>>이라면서 30원씩 나눠주었다. 그리고는 집단학살당한 이들의 혼을 위로한다면서 그 자리에다 비석까지 하나 세웠다. 독립군을 최종적으로는 멸살하려들었던 잔인한 일제의 교활한 수단이 이정도였다.

   한데 “혁명”을 부르짖으면서 항일을 한다는 조공만주총국(화요파)은  그 전해에 도대체 어떻게 했는가 보자. 그자들은 저들 대오내부에서 생겨난 변절자의 작간으로 꾸며진 일제의 반간책(反間策)에 보기좋게 넘어가 있지도 않은 죄를 만들어 “더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인정되여 없애치우기로 결정”짓고는 항일대오를 이끌고 난관을 꾸준히 헤쳐나가고있는 독립군수령 김좌진장군을 죽이여 원쑤의 속을 후련히 풀어준 것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미러한 짓이였다. 한데도 력사를 “연구”한다는 어떤 사람은 그 진상을 잘모르면서 아직도 그때 그자들의 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고집하니 력사가 오도되여도 대단히 오도된 것이다. 력사는 있은그대로 존재하게해야 한다. 이제는 화요파가 민족과 력사앞에 지은 그 수치스러운 죄를 속히지도 덮어감추지도 말아야 한다. 늦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우리의 후대가 건강하게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진상을 제대로 밝혀놓는것이 옳은 일일것이다.

 

   2. 대종교와 한국독립운동

   “대종교는 20세기 민족수난의 시대에 반제국, 반침략 저항정신의 중핵을 이루었으며,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준 민족종교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직면하여 우리 민족은 국권회복운동의 정신적 기반으로써 국조(國租) 단군(檀君)을 구심점으로 삼았다. 민족종교인 단군교(檀君敎)를 재건한 다음, 1910년에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대종교는 종교단체이기보다는 독립운동단체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리하여 종교뿐 아니라 외교, 교육, 경제 다방면에 걸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미(對美), 대일(對日) 외교활동 시도와 ‘을사5적처단’의거 등이 실패하자, 교조(敎祖) 나철(羅喆, 羅寅永)과 그의 동지들은 대종교총본사를 항일무장투쟁의 본거지인 중국 동북지역(滿洲)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대종교 포교를 위해 각지에 설치한 시교당(施敎堂)은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특히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단체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포교활동을 통한 시교당의 설치도 확대되였다.

   그 결과 대종교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단체는 중광단(重光團), 정의단(正義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신민부(新民府), 한족총련합회로 맥락이 이어졌으며, 대종교도들이 주류를 이룬 독립운동단체의 활동 중 대표적인 것이 청산리대첩(靑山裏大捷)이였다.

   이와 함께 각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단군을 독립운동세력의 단결과 통합의 중심가치로 삼음으로써, 만주지역의 우리 민족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중국 동북군벌의 방해와 일제의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기념관 <<대종교와 한국독립운동 특별기획전>>

 

    북로군정서를 말하려면 우선 그 창시자인 서일(徐一)을 빼놓치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이 강력한 대종교 독립군부대를 창립하고 지도한 사람이 바로 대종교의 제4종사며 북로군정서 총재(總裁)였던 그였으니까.

   서일은 초휘가 기학(夔學)인데 1881년 2월 26일생으로서 조선 함경도 농안면 금희동사람이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운 그는 22살에 함일사범을 졸업하고는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이듬해에 조국광복을 바라고 만주로 건너와 대종교에 입교한 것이다. 그리고는 연변의 화룡과 왕청에다 선후 “청일학교”와 “동창학교”를 세우고 민족계몽사업을 하면서 한편 항일무장투쟁을 목적하고 대종교청년들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光團)을 설립하였다. 이에 가입한 자가 무려 1,000명에 달했던 것이다.     

   1916년에 상교(尙敎)가 된 그는 大倧敎總本司典理로 전임(傳任)하여 경전(經典)을 저술하는 한편 포교(布敎)에 노력하여 3년내에 30만에 달하는 교도를 획득했다. 그리고는 1918년에는 중광단의 위력으로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일본침략자를 향해 공개적인 선전을 한 것이다.  

   제2세교주 김교헌은 여러번이나 주교의 자리를 서일에게 넘기려했지만 서일은 대종교일보다 항일독립전쟁으로 먼저 독립을해야겠다는 생각에 대종교주교자리를 끝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당시 주로 훈춘, 화룡, 연길, 왕청 등 4개현을 북간도라 지칭했는데 초기 대종교인이 거주한 곳이 바로 이 4개현이였다. 하기에 그 기반으로 조직된 중광단을 정의단으로 발전시키면서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당시 대종교인중에서도 주요지도자로는 서일과 라중소(羅仲昭)였다.

   서일은 “무오독립선언”이 발표됩과 함께 김좌진을 초빙했다. 그 직후 3.1운동으로 인하여 망명혁명가와 구군대 그리고 애국청년들이 많이 모여와서 사람이 점점 많아졌고 민족의식은 더더욱 고조되였던 것이다.

   1919년 8월 7일, 서일은 김좌진의 제의를 받아들이여 자기가 건립한 대종교의 대한정의단을 대종교의 군정부로 개편하였다.  

   <<....우로 신성의 영광을 조정에 돌리려거든 아래로 노예의 욕됨을 자손에게 남겨주지 않으려거든 이때를 놓치지 말라. 이 몸을 생각하지 말라. 한몸을 순(殉)하여 1백몸이 속죄함은 인도의 원훈(元勳)이니라. 소수를 희생하여 다수를 살림은 정의의 공덕이니라. 누가 살려고 하지 않으리오만은 노예로 사는것은 생의 치옥이요. 누가 죽는것을 싫어하지 않으리오만은 신성하게 죽는것은 사(死)의 영광이니라.

   .....우리 동포 대한의 남매여! 지모가 있는 자는 지모로, 용기가 있는 자는 용기로, 기예가 있는 자는 기예로 각자 능력을 다하여 나서며 무기가 있는 자는 무기를, 량미가 있는 자는 량미로, 금전이 있는 자는 금전으로 각자 힘을 다하여 내놓아서 공적(公賊)일본을 토멸하여 천하의 공분을 씻으며 우리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며 만세에 영광을 남기리.>>

   이는 대한정의단이 무장독립단체인 대한군정회로 재조직되면서 발표한 창의문이다. 열열하고 절절하며 따라서 매력적인 강한 호소력을 갖고있는 이 창의문은 피끓는 젊은이들을 정의로운 항일구국성전에로 불러일으키면서 그들을 자기의 두리에 굳게 묶어세웠던 것이다.

   그당시의 북간도지역을 놓고 보면 기독교계의 북간도국민회를 비롯하여 대한정의군정사, 의군부, 광복단, 이민단, 야단 등 무려 40여에 이르는 각종 단체들이 많았지만 거개가 아직은 무기는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에 비해 백포종사 서일(徐一)과 김좌진이 주도한 군정부는 대종교도들을 기반으로 행정구역을 획정하고 자기의 군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이는 그당시 다른 독립단체들은 생각못한 것이였다. 군정부는 대원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는 한편 무기구입을 다그치면서 재만동포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대중교섭(對中交涉)을 했고 일제와 결사전을 하기 위한 방략구상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 중심인물은 다가 대종교도들이였고 또한 군사리론과 군사훈련을 받은 능력자들이였다. 바로 이같이 대종교를 신봉하는 교포들의 바탕위에 강력한 군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그들은 력사적인 사명을 완수할 준비를 한 것이다. 1919년 12월, 대한군정부는 상해림정의 <<국무원 제205호>>정신에 립각하여 대한군정서로 고쳤다. 그리고는 西路軍政署와 대칭으로  北路軍政署라는 별칭을 가진것이다. 기실 군정부자체에는 조직의 재편에 불과할 뿐 근본변화는 없었다.

   

   3. 북로군정서  

   

   하다면 북로군정서는 대체 무엇이였는가? 그에 대해서는 력사학가 박영석선생이 다음과 같이 귀납했다.

   “북로군정서는 在滿韓人社會의 바탕위에서 조직된 가장 큰 抗日獨立運動團體였다. 더구나 이 북로군정서는 단군(檀君)을 중심으로 한 救國宗敎團體일 뿐만아니라 大倧敎 救國抗日民族獨立運動團體로서 철저하게 정신무장이 된 단체인 동시에 民族軍隊의 性格을 띤 强力한 獨立軍部隊였다.” 

                        <<大倧敎의 民族意識과 獨立運動>> 155쪽

   

   당시 북로군정서가 자리잡은 곳은 왕청현 서대파인 청명향(淸明鄕)이였다. 1,600~1,700여명 군정서구성원(軍政署構成員)의 대다수가 大倧敎人으로서 강한 민족주의자들이였다. 그들은 로씨야로부터 구입한 무기로 무장했고 속성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계속적인 강훈련으로 정예한 독립군을 배출했던 것이다.

   북로군정서 하나만 그런것이 아니였다. 얼마지나지 않아서는 각지에 서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정의군정사, 광복군사령부, 한민회(부민단),  대한독립단, 대한청년연합의용대, 대한독립군비단, 광복단, 의성단, 천마대. 태극단, 대진단, 향약단, 백산무사단, 의용단.... 등등 독립군무력이 생겨나 그를 본받아 다그쳐 림전태세를 갖추었던 것이다. 

   하여 만주의 넓은 산야에서 우렁찬 <<독립군가>>의 노래소리 메아리쳤다.

   이해 즉 1920년 2월 17일자 <<독립신문>>은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론하여 독립전쟁의 결행을 경축하면서 그 승리를 기원했다.

 

  “2천의 독립군의 승첩은 동아의 대혁명의 개시를 <宣 >하는 경종이라하노라. 이미 불은 당기였도다. 독립전쟁의 제1기는 림박하였도다. 폭풍우의 선구자 지평선을 스치고 가도다. <중용한 대한의 남아여, 혈전의 시 광복의 추가 來하였도다. 너도 나아가고 나도 나아갈지라. 정의를 위하야 민족을 위하야 총과 혈로써 조국을 살릴 때가 이때가 아닌가> (군무부포고) 독립전쟁의 제1보에 우리에게 돌아온 이 승리는 즉 독립전쟁의 전도를 하는 승리요, 동아대혁명의 성공을 祝하는 승리로다. 승리를 축하하는 자는 나오라. 승리를 향하야 돌진할 자는 나오라.”

   

   각 독립군들에서는 훈련을 더욱 다그쳤다. 

   1920년 9월 6일, 중국파견군의 혼성려단장 맹부덕이 부하 200여명을 거느리고 직접 북로군정서 병영이 있는 서대파에 나타났다. 완력으로 독립군을 쫓으러 온것이 아니라 일제측에게는 <<토벌>>을 내세우면서 내면적으로 북로군정서의 근거지를 조속히 이동시킬것을 간청하러 온 것이였다. 이런 때에 일본군의 대거침입정보를 수집한 홍범도로부터 안무(安武)등 국민회부대와 함께 장백산밀림으로 들어가서 기회를 보아 일대 격전을 하자는 서신이 날아왔다. 홍범도 역시 독실한 대종교인이였거니와 그가 거느리는 부대도 꼭같은 대종교항일부대였던 것이다. 서일과 김좌진장군은 그의 제의를 쾌히 접수하여 사관련성소에서 6개월간 훈련해온 298명의 사관련성생의 수련을 다그쳐 끝내고는 9월 9일 제1회졸업식을 성대히 했다. 그리고나서 김좌진은 9월 12일까지 졸업한 사관생을 중심으로 한 려행단(교성단)과 150명가량의 사관으로 사령부부대와 북로군정서의 본대를 편성하고 장정준비를 마무리하였다.

   9월 17일과 18일에 드디여 가족을 포함한 서원전체가 80여대의 운송마차에 무기와 짐을 적재하고 서대파의 본영을 떠나 서남쪽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로 진군했다. 그것은 일제토벌군의 간도침략을 사전에 막고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장정이였다.

   2만여명 적군가운데 청산리로 추격 침임한 것이 5,000여명으로 추계, 이를 상대하여 서일, 김좌진, 홍범도는 도중에 청산리회전을 한 것이다.

   1920년 10월, 조선독립전쟁사상에서 금자탑이 되는 청산리대첩!

   상해림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제91호, 1921년 1월 21일자에는 <<김좌진씨 부하 600명과 홍범도씨부하 300명은 대소전투 10여회에 왜병을 격살한 자 1,200명중 적이 자상사살한 자 400명>>이라고 청산리대첩을 기술했다. 

   이어서 2월 25일자 신문에는 북로군정서총재 서일이 림시정부에 써올린 일본침략군의 참패와 독립군의 승전원인을 분석한 글을 발표했다.

                       

                         적의 실패리유

   

   (1) 병가에서 제일 꺼리는 것은 적을 경시하는 것인데 심산 협곡을 별로 수색도 없이 맹진(盲進)하다가 항상 일부 혹은 전부의 함몰(陷沒)을 당함이며 (2) 국지전(局地戰)에 대한 경험과 연구가 부족하여 삼림과 산지중에서 종종 자상(自傷)충돌을 당함이며 (3) 그들 군인의 염전심(厭戰心)과 피사도생(避死逃生)하는 비겁심이 극도에 달하여 군기가 문란하며 사법(射法)이 부정(不精)하여 1발의 효과가 없는 란사(亂射)를 행할 뿐이였다.

                       아군의 전승(全勝)리유

  (1) 생명을 불구하고 분용(奮勇)결투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정신이 먼저 적의 지기(志氣)를 압도함이요. (2) 량호한 진지를 선점(先占)하고 완전한 준비로 사격성능을 극도발휘함이요. (3) 응기수변(應機隨變)의 전술과 예민(銳敏), 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意表)에 출함이다.

  

    전반의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은 련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하여 전사자와 부상자가 3,300여명인데 비하여 독립군측은 전사자 60명과 부상자 90여명에 달하였다. 청산리회전소식은 재빨리 전국, 나아가서는 온 세계에 퍼졌다. 지어는 일본에서까지 커다란 편폭으로 청산리회전에 대한 보도를 실었다. 이로하여 김좌진은 명장으로 세상에 이름날리였고 참패를 승인한 원쑤들은 훗날 청산리골에다 <<초혼비>>까지 세우고는 이를 븍븍 갈면서 갖은 방법을 다하여 김좌진장군은 없애치우려고 벼르었다.

   4. 독립군의 로씨아로 대이동

 

   청산리전투가 끝난 후 다른 여러 독립군부대들도 북로군정서를 따라 밀산으로 갔다. 거기서 그들은 대일방략을 연구한 끝에 힘을 크게 만들기 위해서는 오직 각개 분산되지 말고 한데 단합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방금 청산리대전을 겪은 대종교부대인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위시하여, 밀산으로 온 간도대한국민회, 대한신민회, 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광복군단 등 10개 단체는 통합하여 독립군단을 창설했다. 총재에 서일이 추대되였고 김좌진, 홍범도, 조성환 셋이 부총재로 임명되였다. 그밖에 총사령은 김규식, 참모장은 리장녕, 려단장은 지청천이였다. 이때의 총병력은 3,500여명에 달했다.

   여기서 집고넘어가야 할 것은, 이 독립군단의 지도자 중 구군대에서 군관으로 있다가 넘어온 김규식과 참모장 리장녕을 제외하고는 중견 모두가 대종교도였거니와 병사 역시 반수이상이 대종교청년들이 였기에 여전히 대종교구국항일단체의 성격을 띈 독립군부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이 대한독립군단을 창립해놓은 후 수뇌들은 장차의 구국방략과 아울러 이제는 병력을 밀산에서 어디로 이동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론의하였다.

   이때는 일제가 5만여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만주에 출동하여 독립군을 <<초멸>>하겠다며 한창 날뛰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독립군단의 수뇌들은 론의 끝에 일본군의 추격과 중국당국의 간섭을 피하고 보다 조직적이고도 지속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쏘련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이 방략에 따라서 대한군단측과 쏘련 흑룡주(黑龍州)방면의 독립군측이 상의하던 중 마침내 문창범, 한창해, 오하묵 등에 의해 하바롭쓰크에 있는 공산군 2군단과의 교섭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대한군단은 1921년 1월 밀산을 떠나 국경인 우쑤리강을 건너 쏘련의 이만(伊曼)으로 가게되였다”     <<한국독립군사>>

   

   그런데 이때는 예상밖으로 쏘련의 정세가 이쪽으로놓고 보면 불리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쏘련정부대표 카라한과 일본공사 요시자와는 중국의 북경에서 캄챠카반도 연안의 어업권에 대한 협정을 맺었는데 그때 일본공사는 쏘련정부대표에게 ‘쏘련령토안에서 일본에 대적하는 한국독립군을 육성하면 량국간의 우호관계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고 위협했으며 이에 국내혁명을 방금치르고나서 국력이 쇠약했던 쏘련측은 쏘련령토에서 방금 철거한 일본과의 불화를 경계하던데로부터 독립군의 무장을 해제하겠노라 약속한 것이다.”   <<한국독립군사>>

   쏘련에 건너간 대한독립군단의 각 부대는 북쪽의 흑룡강가에 있는 도시 흑하(黑河)와 마주하고있는 자유시(블라고베쉔스크)에 모이기로했다.

  그러나 김좌진은 현천묵, 리범석 등과 함께 원북로군정서의 극소수만 보내고는 자기대오를 이만(伊曼)에서 더 움직이지 않았다. 예감이랄가, 아니면 선지선각이랄가, 김좌진은 쏘련이 너무나 생소했고 더욱히는 미묘하게 번져지는 형세를 감안하여 자기부대이동을 재삼 고려하게 되어 자유시로 선뜻이 가지 않고 기일을 끌었던 것이다. 이러고있던 중인데 6월 22일 그의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이만(伊曼)일대의 독립군은 쏘련군으로부터 무조건 무장해제통고를 받게되였다.

   기막히는 일이였다.

   약속을 어기는 쏘련측의 행위에 격분한 김좌진은 곧 부대를 거느리고 우쑤리강을 건너 만주로 되돌아오고말았다 이때는 만주땅이 안전했다. 중국인민들의 강력한 성토와 항의에 의하여 북경정부가 일본정부와 반복적인 교섭을 한 끝에 <<경신대토벌>>에 동원되였던 일제군은 5월달에 하는 수 없이 만주에서 철거했던 것이다. 그런데 며칠후에 김좌진은 뜻밖에 <<자유시사변>>이 생겼다는 소름치는 소식을 듣게되였던 것이다.     

   

   <<자유시사변>>이란 1921년 6월 27일 갈란다라시월린의 국제군이 싸할린의용대(朴일리아부대, 니항군이라도 함)의 무장해제를 결정하고,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로하여금 자유시(불라고베쉔스크)의 정세를 감시케하는 동시에 제 29연대가 로령지역(露領地域)의 자유시로 이동한 朴일리아부대를 공격하여 격파한 사건을 가리키는것이다. 손잡고 독립혁명을 하려고 쏘련에 건너간 독립군은 흑룡주 공산계렬의 오하묵과 싸할린의용대 박일리아지간의 군권쟁탈에 말려들어 참중한 희생자만 낸 것이다. 이날에 있은 무장충돌에서 싸할린의용대와 독립군부대는 전사자가 272명, 흑룡강을 건너오려고 뛰여들었다가 익사한자가 31명, 행방불명이 된자 250명, 포로된 자 917명이였다.

   김좌진이 쏘련으로 건너갔지만 자유시로 가지 않고 이만에 머무러있다가 만주로 되돌아온것은 과연 현명한 결책이였다. 자유시로 갔더면 그마저도 군권쟁탈에 말려들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한데 <<자유시사변>>이 있은지 두달만인 8월 26일에 또 <<당벽진사변>>이 발생해서 김좌진은 전혀 예산못했던 혹심한 타격을 받았다.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여 독립군들이 로씨야로 건너갈 때 그와 가장  가깝고 의기상투했던 동지자 총재였던 백포종사(白浦宗師) 서일(徐一)은 둔병제로써 전체독립군의 경제적 뒷받침을 하려는 어려운 중임을 떠메고 밀산남쪽 흥개호가의 중로변경에 있는 당벽진에 남았다. 그런데 주력이 떠난지 불과 8개월밖에 안되는 그날에 한무리의 토비떼가 마치도 피에 굶주린 악마같이 급작스레 덮쳐들어 그곳에서 농사짖고있던 독립군을 전부 살해하여 피바다로 만든 것이다. 너무도 참혹한 훼멸이였다!

   이틑날. 서일은 시교일로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마을은 페허로 변했고 자기가 데리고있던 청년병사들이 전부 살해되였는지라 비통하기 그지없는 절망끝에 이에 책임을 지고 대종사 라철의 <<귀신이 수파람하고 도깨비 뛰노는 허지에 정기빛이 어두우며 백암이 먹고 도야지 뛰여가니 겨레의 피고기가 즐벅하도다. 날 저믈고 길궁한데 인간가는 길이 어디메뇨!>>를 크게 읊조리고는 그만 자결하고만것이다.

   

   한국의 어떤 력사학자는 그것도 <<훈춘사변>>을 일으킨 “장강호”마적단이 한 짓이 아닌지 하는데 <<당벽진참안>>은 그자들이 한 짓이 아니였다. 그것은 “청보산패” 마적단이 한 짓이였다. 밀산과 동녕일대에 근거지와 련락망을 두고있은 그 횡포하기 그지없는 토비무리는 그같이 독립군을 향해 략탈과 피비린 도살을 하고나서 그 이듬해에는 50여명이 따로 작당하여 북만의 흑룡강가의 동강(同江)근처에서 또 무고한 허저족 40명을 살해하는 <<고태자참>>까지 빚어냈다. 그랬다가 그해 즉 1922년말과 1923년초에 허저족이 주도가 되어 조직된 “복수대”의 숙청에 들어 끝내 소멸되고 만 것이다.

   나는 30년 넘어 전문 북만토비를 연구하다보니 그 사실을 조사하여 알아 낸 것이다.

   한데 력사사실은 이러함에도 연변대학에서 력사를 가르치고있는 리광인선생은 <<김좌진장군의 피살배후 연구(2)>>에서 “김좌진장군 피살원인”을 아래와같이 규명한 것이다.

   “청산리전투 뒤 김좌진은 밀산으로 철퇴하였다. 반쏘반공정서를 품은 김좌진과 그의 부하들은 쏘련으로 넘어가지 않고 밀산경내(역사사실은 김좌진도 월경했음)에 머물면서 밀산진의 상점과 량식을 털어먹었다. (원 필자주: 지금북만의 70여세되는 노인들은 이 사실을 잘안다.) 서일은 이 사실을 듣고 비분에 차 밀산현 당벽진에서 굶어 자진하였다.”

   <<연변문사자료>>제4집 <<20년대후기 재만조선공산당인들의 활동>>에 서술된 것이라면서, “이는 량환준로선배가 스스로 지어낸 력사근거가 아니다”, “조공만주총국에서는 상기리유로 김좌진을 <<더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인정되어 없애치우기로 결정>>하고 행동했다”고 하는데  아무렴 어쩌면 없는 죄를 그같이 험하게 날조하는가? 자료에 “지금 북만의 70여세되는 노인들은 이 사실을 잘안다”고 원필자주까지 달았으니 피끗보아 신빙성이 있는것 같으나 그 력사자료는 과연 한심하기 짝이 없다!

 

   5. 신민부에 관하여 

   

   대종교항일무장부대로서의 북로군정서는 설립되여 백성들에게서 걷어들이는 군자금에 이뢰한것만은 사실이다. 지어는 조선에 까지 가서 군자금모집을 하다가 모집자가 희생된 일도 있는것이다. 한데 여기서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에 적극적으로 호응해나선것은 그때 만주에 거주했던 30만에 이르는 대종교도들이였다는 그것이다. 북로군정서의 군자금을 거두는 일은 각지의 시교당이 전적으로 책임지고있었다. 제일 숨이 가빳을 때는 “청산리전쟁”직전 무기살 돈을 장만하는 한편 로령을 넘나들며 서둘렀을 때였다.

   후에는 차츰 자급(自給)을 위주로 했기에 군자금거두는 일이 백성을 죽일지경까지 그렇게 혹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연변문사자료>> 제4집에

   “김좌진은 부하 수십명을 데리고 목릉현에 가서 성동사관학교를 꾸렸으나 군중들이 반대하고 농민들이 경비와 식량을 내지 않아 페교하고말았다”, “1925년 산시일대에 가서 <<통치식>>단체인 <<신민부>>를 세우고 스스로 총사령이 되었으니  밀산, 목릉, 동녕, 녕안(동남부)과 주하 아성 등지의 조선족농민들이 경비와 식량을 납부하지 않아 아주 고립상태에 처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력사사실과 맞지 않는것이다. 

   첫점 신민부(新民府)를 <<통치식>>단체로 본것부터 틀린다. 신민부는 다른 기관과 달라 대종교리에 바탕을 두고 조직된 조선민족자체의 준국가식 민생자치기관으로 보아야 옳은것이다. 한것은 신민부에는 그 중진들 다가 독실한 대종교도였고 기반이 만주각지 32개에 달하는 시교당(施敎堂)과 그 교도들이였기 때문이다. 신민부의 대표적인 중앙집행위원장은 김혁(金赫)이지 김좌진이 아니였다. 김좌진장군이 신민부내에서의 초기직책은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이였다. 그런데 1927년 2월에 김혁이 일만경합동수사대(日滿警合同搜査隊)에 체포되였고 후에는 서대문감옥에 넘겨졌다. 이런 상황에서 김좌진은 선출에 의하여 총사령 겸 중앙집행위원장의 직을 맏게 된 것이지 “스스로”된것은 아니였다.

   준국가식의 신민부를 꾸려가기 위해 책택한 결의안이 모두 12가지 조목인데 그것을 보면 목적과 방향이 뚜렷하다. 제도가 선거에 의하는 위원제로 되었는데 그같이 보는건 신민부에 대한 몰리해를 표시하거니와 김좌진을 독재자로 몰아버리느라 조작한 험구로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밀산, 목릉, 동녕......등지의 조선족농민들이 경비와 식량을 납부하지 않아 아주 고립상태에 처라게 되었다”고 한것도 지나친 소리다. 신민부가 전적으로 조선족농민들이 납부하는 경비와 식량에 의해 유지된것은 아니다. 

   

   아래것은 <<北滿新民府史略>>에 근거하여 서술한 당시의 력사사실에 대한 나의 글이다. 

   

   “ ‘둔병전을 하자면 토지가 있어야하는데 돈이 없지 땅을 어떻게 구한단말인가?’

   김좌진이 부대를 이끌고 나타나자 북만에서는 조선동포들은 물론 중국백성들까지 모르는 이라고는 별반없었다. 그같이 청산리투쟁에서 혁혁한 위훈을 떨치였던 이 독립군장령은 아직 그 위망이 퍼렇게 살아있었다. 김좌진은 자신의 이같이 유리한 점을 리용하여 지방당국과 교섭하여 되도록 관계를 좋게하려고 했다. 외국인으로서 이국땅에 발을 붙이자고 보니 그렇게 해야지 달리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알아보니 산시(山市)에 아직 미개간지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김좌진은 친히 나서서 그곳을 고령자와 같이 독립군의 주요한 둔병지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을앞의 2헥타르되는 밭에 장태콩을 심어먹기 위해 성이 마씨(馬氏)인 지주한테서 사고는 임자없는 습지판에 물도랑을 빼고 98헥타르의 논을 풀었다. 황지촌에 있는 얼마가량의 땅도 먼저 몇해간 부쳐먹다가 땅세를 적당히 물기로 지방관부와 협상했고 녕안의 땅 얼마가량도 그런 방법으로 차지했다. 신민부는 다방면의 노력끝에 사전자(沙田子)에도 수한전합해 5헥타르있게됐고 고령자, 석두하자, 백모자, 해림 등 여러곳들에 논과 천수답들이 얼마간씩 다 있게되였다.

   한편 신민부는 무장인원을 내놓고는 이젠 나이 많고 잔약하거나 남정북전에 고생많이했고 몹시 피로해진 900여명 독립군들을 <<재향군인>>이라 이름을  짓고 안착해서 농사짓게 했다.

   공농제(公農制)의 실시를 위해 이런 <<재향군인>>들은 붙임땅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원도 많고 적게 나뉘여졌는데 그들은 자기가 간 곳에서 가정까지 이루었다.

   그렇지만 조직성과 규률성만은 의연했는바 유사시에 손에 무장만 잡고 나서면 여전히 당당한 전투원이였다. 신민부는 또한 군구제(軍區制),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면서 자기관할내의 18세이상 40세이하의 청년과 장년들에게 군사훈련을 계획있게 시켜서 장차 맞이할 항전을 준비하고 상비군을 보충하려 하였다.

   한편 신민부는 정예군인양성을 목적해서 목릉현경내에 있는 소수분(지금의 綏陽), 팔리평(八里坪)골안에다 사관학교를 세웠다. .....둔덕에 묘하게도 흡사 비행장같은 널다란 공지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공지의 서북쪽끝머리에 자그마한 삼각산이 하나 솟아있는데 그 산꼭대기에는 고려옛성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한즉 사관학교는 고려옛성의 동쪽에 위치한 셈이다. 하여 이름을 성동사관학교라 지어부르게 된 것이다.

   성동사관학교는 교장에 김혁, 부교장에 김좌진, 교관에는 박두희, 백종렬, 오상세 등이 취임하여 련 2기의 속성교육을 실시해 그후 500여명의 사관생을 길러냈다.

   신민부는 발족하면서부터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맑스주의자, 레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각계각층이 모여서 다만 항일과 자주와 독립이란 대전제하에 굳게 뭉쳐 일제타도에만 전력을 기울이기로 약속하였고 또한 지성인이 갈구하던 시대적경향에 가장 적합하게 <<시대사조에 순응 병진한다>>는 선언을 한바가 있었기에 력사적인 사명을 완수하리라는 믿음으로부터 내외인사들의 기대와 관심을 모았다.

   그리하여 불원천리하고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

   

   한데 신민부라는 이 어마어마한 기관은 명성과는 너무도 다르게 겉으로 보기에는 한심스러울 정도로 간소하고 검박했다.

   초창기에는 신민부의 중앙기관이 주하현(珠河縣)의 동포부락인 소량자(小亮子)에 설치되였고 중앙집행위원장 김혁과 민사부위원장 최호, 경리부위원장 유정근 등이 소속직원 약간명을 데리고 각기관련락과 기타사무를 처리했다.

   그럴 수밖에.

   일제는 신민부의 일거일동을 주목했고 간부들을 일망타진하려고 노리였던 것이다. 지어 중요간부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까지 내걸고 밀정들을 기관내부로 잠입, 암해음모를 획책하고있었기 때문에 령수급인물들은 주위의 경계를 특별히 심하게 해야 했었다.

   이런 환경속에서 김좌진은 고정지점이 거의 없다싶이 지냈다.”

   세원이 가면서 어려운 환경속에서 신민부는 차츰 분렬이 생기였다.

   “김동삼의 주장으로 되어있는 시사연구회는 반석에서 남만혁명동지련석회를 열었다. 그리고는 돌아오는 해 즉 1928년 3월 1일에 유일당촉성회의를 개최하고저 재만 32개 독립군단체에 대표를 파견하라는 통지서를 보냈다. 김좌진은 주의여하를 막론하고 단합된 통일로선을 결성하는게 옳다고했다.

   그런데 신민부는 12월 25일 석두하자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성원들이 군정파와 민정파로 분렬되고말았다. 군정파는 북로군정서에서 백야장군과 함께 무장투쟁을 해왔던 무관학교출신이였고 민정파는 최호(崔灝)를 중심으로해서 민중을 위한 자치활동에 주로 과여해오던 인물둘이였다. 알륵의 시발점은 신민부가 무력투쟁을 우선해야 하는가 아니면 교육, 산업을 우선 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론을 놓고 생긴것인데 대립이 첨예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28년 2월 3일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간부들은 녕고탑에 모여 회합을 갖고 4월중순에 3부련합회의를 개최키로 결정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신민부에서는 지난말에 분렬되였던 군정파와 민정파간의 알륵과 모순이 점점 더 심해가면서 첨예해져 서로 대방에 대한 공격으로 넘어가고말았다.”

   말기에 이른 신민부의 정형을 보면 초창기의 그 으리으리하던 형상과는 다르게 벌써 파철더미나 답지 않은 군함으로 변해버렸다.

   “젊고 총명하다는 젊은이들은 적지 않게 좌익으로 넘어가버리였다. 청산리싸움때 공이 있는 강화린 역시 조공만주총국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무데의 사람이 되든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세계 약소민족의 혁명을 위하여 몸바쳐 싸워 공을 세우기만 하면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지는 못하고 그런 사람이 옛동지를 원쑤처럼 대하면서 당쟁에만 지혜를 소모한다면 그건 무서운 일이다. 문우천같은 사람은 김좌진의 사랑을 받았건만 지금은 민정파로 넘어가 공공연히 적대행동을 하면서 배신자가 돼버린것이다.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이 영풍(英風)을 숭상하고 따르지만 김좌진을 위해 진정 맥을 쓸만한 측근으로서는 북로군정서때부터 휴척을 같이하던 정신과 근로인민의 출신 권화산, 족질되는 민무외 몇밖에 없다. 민족주의진영은 리론이 빈곤해졌고 풍미(豐美)해오는 세계사조에 대처하여 순응할만한 인물이 너무나 부족했다. 거세찬 풍랑을 헤쳐가자면 든든한 함선이 있어야할게 아닌가. 갈 사람은 다 가고말았다.

   내우와환(內憂外患)의 복새통에 사분오렬이 되어버린 신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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